제로 웨이스트와 한국 유통 구조의 문제점
한국의 유통 시장은 오랫동안 ‘포장이 곧 서비스’라는 소비자 인식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특히 대형마트,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제품 품질 외에도 포장 상태가 고객 경험의 하나로 간주하며,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포장을 정교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제로 웨이스트 실천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제로 웨이스트의 핵심은 불필요한 쓰레기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내 유통 구조에서는 기본적인 식품이나 생필품조차 이중, 삼중 포장으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고, 이는 소비자의 선택권과 무관하게 쓰레기를 양산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사과 한 알이 개별 플라스틱 상자에 들어 있고, 그것이 다시 트레이에 담긴 후 비닐 랩으로 감싸져 있는 식입니다. 이러한 과잉 포장은 환경 관련 문제뿐 아니라 소비자가 친환경적 소비를 실천할 기회를 원천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또한, 배송 중심의 온라인 유통 구조는 포장재 사용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제품의 파손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용되는 에어캡, 스티로폼, 다량의 비닐 완충재는 배송이 많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일회용 쓰레기의 주요 배출원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쇼핑이 폭증하면서 택배 포장 폐기물도 함께 증가했으며, 이를 회수하거나 재활용하는 체계는 아직도 매우 미흡한 실정입니다.
따라서 한국 유통 구조는 기본적으로 ‘편리함과 브랜드 경험’을 중시하며 제로 웨이스트라는 지속 가능성 원칙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소비자 개인이 아무리 친환경적인 선택을 하려고 해도 실질적인 제로 웨이스트 실천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제로 웨이스트 소비를 방해하는 선택지 부족과 정보 비대칭
제로 웨이스트 실천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친환경적 제품과 서비스를 쉽게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유통 시장에서는 이러한 선택지를 제공받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온라인 쇼핑에서는 ‘친환경 배송’ 혹은 ‘무포장 옵션’을 제공하는 플랫폼이 매우 드물고, 오히려 일반 포장보다 더 많은 쓰레기를 유발하는 형태의 상품이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더불어 ‘포장재 재질’, ‘재활용 가능 여부’, ‘제품 생산과정의 탄소 배출량’과 같은 정보가 명확히 공개되지 않아 소비자가 실질적으로 친환경적인 선택을 하기가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코 패키지’라는 문구는 붙어 있으나 실제로는 플라스틱과 종이가 혼합된 형태로 분리배출이 어려운 경우도 많고, ‘친환경 소재’라고 강조하지만, 구체적인 인증 정보나 생산 과정은 생략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그린워싱(greenwashing)의 위험성과도 연결되며, 제로 웨이스트 실천 의지를 가진 소비자조차 혼란에 빠지게 되는 구조적인 문제로 이어집니다.
오프라인 유통 환경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대형 유통업체에서는 여전히 포장 없는 상품이나 리필할 수 있는 제품의 비중이 작고, 친환경 소비가 가능한 별도의 매대나 구역도 드뭅니다. 소수의 친환경 제품은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으로 고가에 책정되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이는 제로 웨이스트 실천이 일부 소비자만의 실험으로 제한되는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소비자가 선택할 수 없는 구조에서는 실천이 이론에만 머물게 됩니다. 지속 가능한 소비는 개인의 윤리만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유통 구조가 친환경적인 소비 흐름을 유도하고 도와주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제로 웨이스트 실천을 가로막는 리필 시스템의 부재와 규제의 한계
제로 웨이스트 실천을 본격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기존 유통 구조를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리필 시스템입니다. 리필 시스템은 사용한 용기를 다시 채워 쓰는 구조로, 원칙적으로는 포장재를 줄이면서도 소비자의 편의성과 제품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유통 방식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리필 구조가 유통 산업 전반에 걸쳐 거의 정착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샴푸나 세제, 화장품 같은 생활용품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마트 내에 리필 스테이션이 설치되어 소비자가 직접 용기를 가져와 충전하는 시스템이 일반화되어 있는 데 반해, 국내 대형 유통업체에서는 이러한 시스템을 찾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리필제품은 별도로 온라인에서 구매해야 하고, 그마저도 또 다른 포장에 담겨 배송되기 때문에 실질적인 포장 절감 효과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정착되지 못하는 데에는 규제의 문제도 있습니다. 한국은 식품과 화장품 등 인체에 직접 닿는 제품에 대해 위생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되어 있지만, 리필 시스템에 맞는 법적 예외나 인증제도는 부재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리필 매장을 운영하려는 사업자로서는 많은 법적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대형 유통업체 역시 이러한 규제 리스크를 감당할 인센티브가 부족합니다.
결국 리필 시스템 부재는 소비자의 실천 의지를 꺾고, 제로 웨이스트의 실질적인 정착을 가로막는 큰 장벽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소비자가 제품 하나를 선택할 때 리필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하려면, 시스템과 법이 먼저 유연해지고,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로 웨이스트는 단지 '의미 있는 슬로건'에 그치고 말 가능성이 큽니다.
제로 웨이스트를 위한 유통 구조 혁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제로 웨이스트 실천이 일상화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소비자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현재의 유통 구조는 소비자가 친환경적 선택을 하려는 시도를 지속해서 방해하고 있으며,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제로 웨이스트가 가능한 방향으로 유통 구조 전반을 재설계해야만 합니다.
첫째, 기업은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포장을 줄이거나 생분해성 소재, 단일 소재 포장 등을 도입해야 합니다. 소비자의 분리배출 의무보다 먼저, 기업의 책임 설계가 뒷받침되어야 쓰레기 없는 구조가 가능해집니다. 둘째, 대형 유통업체는 리필 시스템을 도입하고, 무포장 제품의 판매를 확대함으로써 소비자가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합니다. 셋째, 정부는 유통 업계에 대한 그린 규제와 동시에 그린 성과급을 병행해 실질적인 구조 전환을 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제로 웨이스트 소비’를 가시화하고 보상하는 시스템도 필요합니다. 포장재 없는 제품에 대한 가격 인하, 친환경 구매 포인트 적립, ESG 인증 연계 마일리지 제공 등은 소비자 행동을 긍정적으로 유도하는 강력한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오히려 친환경 제품이 비싸고 불편하다는 인식이 강한데, 이것은 구조적으로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제로 웨이스트는 환경적 가치를 넘어선 산업 구조와 소비문화의 재편을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소비자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유통 구조 전반이 바뀌지 않는 한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개인 실천과 기업 전략, 정부 정책이 맞물리는 체계적 접근 없이는 제로 웨이스트는 현실과 괴리된 구호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의무감을 넘어, 시스템 차원의 전환을 실현해야 할 때입니다.